유서 깊은 선비 고을, 진주 사곡 마을을 찾아
문화재 마을로 이름이 널리 퍼져
진주 수곡면 사곡마을은 예로부터 예와 덕행을 중시하는 선비마을로 많은 선현들을 배출하였다.
진주 수곡면은 단일 면치고는 문화유산을 가장 많이 소유하고 있는 지역으로 알려졌다. 그 중 사곡 마을은 예로부터 예와 덕행을 중시하면서 많은 문화재를 지니고 있는 유서 깊은 선비 고을로 소문이 자자하다. 또한, 전통한옥을 고스란히 안겨놓은 한옥마을로도 유명해 지인과 함께 사곡마을을 찾기로 했다.
면사무소 네거리에서 북쪽으로 2㎞ 달려가니 사곡마을이 나온다. 마을의 산세는 지리산 천왕봉의 줄기가 뻗어내려 와 마지막으로 맴돌아 멈춘 곳이다. 아늑한 품이 예로부터 거유(巨儒) 명현(明賢)이 태어날 고을로 지목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사곡마을에 당도하니 마을 앞 연못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연못 주변, 최초로 마을 터를 잡았다고 전하는 석계하선생조기비가 우뚝 자리 잡고 있다. 그 둘레에 양정공 하경복 생가터 와비도 말없이 서 있다.
사곡마을 앞 연못이 정취를 더하고 마을숲 속의 송정종택과 석계공의 사곡 창기비, 양정공 하경복선생의 옛 집터를 보여주는 와비가 특히나 인상적이다.
먼저 진양 하씨 판윤공파 22대 종손 하동준 씨(69세)가 반가이 맞이해 주었고 종부 또한 미소 머금은 모습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하 종손은 사곡마을에 대해 자세한 안내 설명이 이어졌다. “송정 하수일 공 증손 석계 하세희 공이 이곳으로 이거한 후 문행과 부력을 두루 가진 마을”이라며 “마을 100여 호는 거의 모두가 하씨 성으로 진양하문의 집성촌이지요. 마을 곳곳에 서 있는 재실과 정각, 서원과 정려, 그리고 400년 수령의 와송과 느티나무 등이 터를 잡고 있어 오랜 역사를 지닌 선비고을임을 알게 해 주지요”라고 말문을 열었다.
‘송석세가’ 편액을 달고 있는 송정종택 사랑채가 너무도 위엄스런 자태를 보여주고 있다.
종갓집답게 대문부터 시작해 한옥의 규모는 물론 안채와 사랑채, 정원 등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높다란 자태가 돋보이는 사랑채에는 ‘송석세가(松石世家)’라는 편액을 올렸다. 송정공과 석계공의 호를 따서 지은 것으로 명문세가의 역사를 그대로 말해준다. 앞마당에는 문회각이 버티고 있다. 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진양 하씨 송정종택 소장책판을 보관하는 곳이다. 4종의 책판 판목으로 ‘송정집’, ‘각재집’, ‘백암일고’, ‘대각서원칠선생실기’ 목판 등 모두 112매이다. 이 책판들은 원래 진양 하씨 시조인 하공진의 사당인 옛 경절사 아래에 있는 낙수암에 보관되어 오던 것이다. 이 책판들은 진주서부지역의 16세기 후반 남명학파의 면모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고 한다.
송정종택 대문에 들어서니 앞마당에 소장책판을 보관하는 문회각이 보이고 4종 112매의 목판이 보관 중에 있다.
하 종손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송정종택 소장 고문서들이다. 분재기와 노비 소송 관련 입안, 호구관련, 토지매매문기 등 모두 108점이나 된다고 한다. 이는 조선시대 지방과 지방사 연구는 물론 당시 진주지역의 문화사 전반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이 모두는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증, 보관된 상태라고 한다.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수호목인 와송이 거의 누워있는 듯 고귀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가까이 있는 마을회관을 찾았다. 마침 진양 하씨 후손인 하병준 씨(79세)와 진양 하씨 대종회 사무국장인 하경철 씨(74세)를 만났다. 그다음 일정은 두 분과 동행하기로 했다. 마을 중심을 지나 샛길로 접어드니 거의 누워있다시피 한 진주시 지정 보호수 소나무 두 그루가 눈에 띄었다. 한 그루는 지난해 태풍 피해를 입어 고사 직전에 있기에 안타까웠지만 한 그루는 그 자태가 용트림하는 듯 신비롭기 짝이 없었다.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지키는 수호목 역할을 하고 있다.
이산재 재실이 옛 자취를 감추고 남은 터만 보일 뿐, 광명각과 수졸재 재실은 옛 모습 그대로이다.
쭉 돌아가니 또 하나의 소중한 유산을 만나게 되었다. 글공부 소리가 들릴락 말락 하는 수졸재와 옛 모습이 사라지고 유지만 전해지는 이산재 위쪽 높은 곳에 광명각이 우뚝 서 있다.
이산재 유지비만 덩그러니 서 있고 수졸재와 앞 연못은 세월의 무상함을 일러주며, 주자어류책판을 보관하는 광명각은 더더욱 돋보인다.
광명각에 보관되어 있는 ‘주자어류책판’은 이들의 자랑거리이다. 본래 송나라 여정덕이 주자와 그 문인들과의 문답을 집성 편집한 50책이나 되는 방대한 양으로 성리학 연구의 필독도서로서 도 유형문화재로 지정, 희귀한 자료임은 틀림없다. 선조 8년에 처음 간행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인조 때 다시 간행, 또 불타버려 영조 46년에 간행되었다. 그 후 1904년 서부경남 선비들이 모여 산청 대원사에서 간행한 2076매가 보관되어 있다.
남명 조식 선생의 제자인 칠현의 향사를 올리며, 동재 및 서재에서 유생들이 글공부하는 옛 모습이 더듬어지는 대각서원이 묵묵히 자리하고 있다.
동행한 두 분가 함께 오솔길을 가로질러 대각서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전면 5칸, 측면 2칸 규모로 전후 툇집 형식이고 정면 기둥은 배흘림을 둔 두리기둥이며, 홑처마에 팔각지붕 형식이다. 동재와 서재가 현재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진주 소재한 서원 중 중 가장 일찍 세운 서원으로 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광해군 2년 남명 조식의 제자인 각재 하항을 비롯하여 송정 하수일 등 칠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는 향사를 올리고 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8년에 복원하였다.
진양 하씨 재실로 송종 하수일 선생을 위해 세워진 낙수암은 그 주변 정취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산기슭을 지나 오르막길을 향했다. 아주 시원한 계곡이 보인다. 산 뒷산에 자리 잡은 낙수암이다. 이름 그대로 계곡의 널따란 바위가 층층이 내려 쌓인 듯 계곡물이 흘러 그 아름다운 풍치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송정선생 장구지소(杖屨之所)’라고 새겨진 입구 암벽이 눈에 들어왔다. 정조 13년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하수일 선생을 위해 세운 진양 하씨 재실이다. 정면 4칸 팔작지붕으로 한때 송정종택 소장책판을 보관하기도 했다. 입구에 송정하선생사적비가 웅장하게 자리하고 있어 그 중압감에 주눅이 들 정도였다.
‘송정 선생 장구지소’ 글씨가 새겨진 바위를 지나 낙수암 계곡의 층층바위들, 송정선생 사적비, 옛 경절사의 모습이 퍽이나 인상 깊다.
하수일 선생(1553~1612)은 경상도도사, 형조⋅이조정랑을 역임하였고 하항에게 배운 남명학을 하홍도에게 전수하였다. 단성향교 성전중수기, 덕천서원 세심정기, 촉석루중수기 등 많은 글을 남긴 뛰어난 문장가로 남명학의 중추적인 인물이다.
옛 경절사 옆 ‘아시고려인, 불감유이심’ 글씨가 새겨진 와비가 우뚝 서 있다. 진양 하씨 시조인 하공진 공의 충절을 깊숙이 엿볼 수 있다.
낙수암 바로 위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낙수암은 진양 하씨 재실로 송정 하수일선생을 위해 세워졌다. 사당인 옛 경절사가 보였다. 진양 하씨 시조로, 고려 초 거란에 끝까지 대항하다 순절한 충신 하공진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처음부터 모셨다. 그 후 1992년 진주성내 하공진 유적지에 충의당과 경충사에 모시고 사우 현판을 경절사로 교체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바로 언덕배기에 ‘ 아시고려인(我是高麗人) 불감유이심(不敢有二心)’이 석조된 와비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고려인이다. 감히 두 마음을 가질 손가!’라는 비문이 보여주듯 시조 하공진 공의 충절을 넉넉히 알 수 있었다.
조선 후기 무신, 양정공 하경복장군의 묘와 신도비를 바라보니 경건한 마음과 함께 위압감을 느끼게 한다.
뒤이어 도 기념물로 지정된 조선후기 무인 양정공 하경복장군의 묘소를 찾았다. 묘의 형태는 기단에 갑석을 얹어 방형으로 호석을 두른 다음 흙으로 봉분을 조성하였다. 상석과 장명등, 좌우 각각 석마와 장군석을 두었다. 양정공 하경복선생 신도비가 우람하게 자리 잡고 있다. 하경복 선생은 조선 태종 2년 무과에 급제, 1410년 무과중시에 급제한 후 무관으로써 여러 관직을 거쳐 15년 동안 북방의 국경지대를 수비하였다. 백성을 사랑하고 변경지방의 경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특히 1433년 여러 학자들과 함께 진서(陣書)를 편찬할 때 총재로 참여하였는데, 이는 군사교육의 교재가 되었다. 1436년 경상도병마절제사가 되어 국방에 충실하여 국가 기틀을 견고하게 하는데 이바지하였다. 묘소를 둘러보니 경건한 마음이 가슴 깊숙이 사무친다.
회봉 선생에게 학문을 배우던 선비들이 머물던 처소인 덕곡서당, 지금까지 석채례를 유일하게 올리고 있다. 회봉 하겸진 선생의 묘와 묘도비를 바라보니 옛 자취를 그대로 느낄 있다.
마을 동쪽 눈앞 야트막한 언덕 위에 고풍스런 건물이 자취를 드러냈다. 왼쪽 솟을대문이 세워진 곳이 덕곡서당, 그 오른쪽 작은 사립문이 달린 곳이 회봉 하겸진 선생의 묘소이다. 덕곡 서당은 회봉 선생에게 학문을 배우던 선비들이 머물던 처소로 매년 3월 문생들이 모여 석채례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해방 후 당대 최고의 국학자들이 회봉 선생을 만나기 위해 덕곡 서당을 방문했다고 하니, 가히 그 선비들의 진지한 목소리가 배여 있는 듯하다.
진주성 내에 자리하고 있는 진양 하씨 시조, 하공진 유적지이다. 고려충절신 증시랑 하공진 사적비와 경절사 경앙문, 경절사당 열일문과 주변 경내가 특히나 돋보인다.
사곡마을은 400년의 역사를 가진 진양 하씨 판윤공파 집성촌으로 한 때 200호 이상이 번성한 씨족으로 진양하문의 전통을 이어오는 큰 마을이었다. 고려시대부터 농사를 지어온 농토 그대로를 대대로 이어 농사지을 정도인 이곳 마을 주민들은 고려답을 소유한 집이 상당수라고 한다.
특히 요즈음은 마을에서 아기 울음소리를 들어본 지가 오래전이라고 한다. 현세에 이르러 새 생명의 태동인 ‘새싹의 산실’이라는 의미로 ‘싹실 마을’로 통용되고 있는 전통마을이다. 풍속이 온후하고 예와 덕행을 중시하는 마을 분위기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경남 아니 전국에서도 유서 깊은 선비 고을이면서 전통한옥과 많은 문화재를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한 진주 사곡 마을을 한 번쯤 탐방해 보면 어떨지 강력히 추천해 본다. 출처 경남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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